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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어긋난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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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세공 댓글 0건 조회 2,836회 작성일 12-01-18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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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가족과 사별하기도 하고 죽을병에 걸리기도 하지요.
사고나 불행한 일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고비고비에서 늘 닥치는 일입니다.

배우자의 외도도 그런 사고 중의 하나입니다.
살면서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이지요.
결혼을 한 O자는 누구나 한번쯤은 O편의 외도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O편은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부담으로 안고 있는 숙제입니다.

배우자의 외도는 다른 불행과는 달리 여러 가지 복잡한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내 존재가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고 자존심이 상합니다.
상대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고 가까운 가족에게도 고통을 호소하기 힘들지요.
내가 피해자인데도 나를 자책하게 되고,
내가 나서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하며,
그 일의 결과는 온전하게 내 남은 삶의 무게가 됩니다.
그리고 가해자인 O편과 피해자인 내가,
같은 공간에서 운명공동체로 남은 생을 또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O편의 바람에 대해, 대부분의 O자들이 생각하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O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차분히 조사하고 증거를 모읍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O편을 마음껏 모욕해줍니다.
많은 위자료를 받은 후 더러운 O편을 벌레 보듯이 쳐다보며 쿨하게 이혼합니다.
이혼당한 O편은 뒤늦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고 후회하면서
남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을 아름답게 응징한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삽니다. 끝.
O편의 외도를 상상하면서 그리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현실에는 저 아름다운(?) 그림을 해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엄청난 위자료와는 거리가 먼 O편의 주머니 사정과 애들이 그것이지요.
하지만 저 아름다운 시나리오를 꼭 구현해야 한다는 내 의지를 가로막거나 꺾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합니다.
저 그림이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좀 모자라거나 부족한 사람들이라 그런줄 알았지요.
동화에서 착한 언니가 죽을 고생을 하지만 결국은 왕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저렇게 되지 않는다면, 인생이 저렇게 풀리지 않는다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러면 반칙이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이상한 곳입니다.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는것보다는 반칙이 더 많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저그림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 O편은 절대 바람피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주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뭐지?
그러다가 번개처럼 스쳐가는 어떤 느낌이 있어서 이것저것 알아보게 됩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사태에 직면하지요.
O편에게 이게 뭐냐고 난리 난리를 칩니다.
O편은 사실대로 불기도 하고 뻗대기도 하고 이혼하자고 튀어나가기도 합니다.
정의의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올까봐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되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O편에게 뒤통수 맞기도 합니다.
쿨하게 O편만 상대해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일에
상대 O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끼어듭니다.
하지만 상대 O자를 제대로 혼내주지도 못합니다.
이혼을 하려니 자식들이 발목을 잡고 이혼해서 애들을 혼자 키우고
살 수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됩니다.
O편과 상대 O자는 흠집 하나 없이 이 사건에서 빠져나가고
나 혼자서만 고통의 진창에서 헤맵니다.
나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복병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그림을 만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입니다.
O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고통스러운 것보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O편의 눈치를 살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가정이 깨질까봐,
O편이 뛰쳐나갈까봐 전전긍긍하며 사건을 처리한,
아니 무마한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더욱더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이혼하지 못하고 제대로 응징하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살고 있는 자신에 대
한 혐오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는 과연 현명하게 처리한 걸까,
더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았을까,
왜 나는 그렇게 바보같았을까,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이 모든 일은 O편이 100% 잘못한 일인데도
제대로 사과도 받지 못해 더 화가 납니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지도 못했지만 뾰족이 다른 방법도 없어,
내 마음을 알아주려니 하고 대충 용서해줍니다.
세월이 가고, O편은 그 일이 꿈이었을까 생각이 들만큼
맑은 얼굴로 잘 살아 갑니다.
혼자 골병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요.

사는 건 늘 기대와 어긋나는 일입니다.
산다는 건 어찌나 남루한 일인지,
그 진실에 부닥치면 어안이 벙벙한 일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O편의 바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생각하는 그림과
들어맞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이 사건에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일을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사건이 모두 끝난 뒤에도 여전히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합니다.
O편의 바람은 내가 원하는 그림처럼 '우아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맘대로, 내가 그렸던 그림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내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내가 바보여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 일 자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일입니다.
결혼이, 삶이, 이 사건 자체가
본질적으로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지요.
세상은 권선징악의 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의와 진리가 늘 승리하는 곳이 아니지요.
O편의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억울한 피해자지만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하고 보상도 받지 못합니다.
O편에게 욕을 퍼부어줄 수도 없고 혼을 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동화를 읽는 아이가 아니지요.
현실은 동화가 아닙니다.
이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6,000여명의 전북 테니스 동호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직시하셔서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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